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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리시아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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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갈리시아 왕국은 이베리아 반도 북서부에 존재했던 역사적 왕국으로, 수에비 왕국(409-585)에서 시작하여 서고트 왕국의 지배를 거쳐 아스투리아스 왕국 및 레온 왕국 시대(711-1230)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기를 거쳤다. 1128년 포르투갈이 분리되었으며, 이후 콤포스텔라 시대(1111-1230)를 거치면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가 종교적 중심지로 부상했다. 1230년 카스티야 왕국에 통합된 후, 정치적 영향력이 감소했지만, 1833년까지 카스티야 왕관 아래에서 자치성을 유지했다. 1833년 스페인 지방 행정 구역 개편으로 공식적으로 소멸되었으나, 갈리시아는 스페인 자치 지방으로 독자적인 문화와 언어를 유지하며 발전해왔다. 주요 상징으로는 레온 왕국의 사자 문장과 갈리시아를 상징하는 성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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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리시아 왕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갈리시아 왕국의 역사적 깃발 (문장 포함)
깃발 (c. 1282)
갈리시아 깃발
갈리시아 깃발
16세기 갈리시아의 문장
문장
표어여기가 우리가 확고하게 밝히고 있는 그 믿음의 신비함이 위치한 곳이다.
로마자 표기Hoc hic misterium fidei firmiter profitemur
국가갈리시아 왕국의 오랜 행진 ("Antiga Marcha do Reino de Galicia")
갈리시아 왕국의 지도
11세기 갈리시아 왕국의 위치 (빨간색)
수도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
공용어라틴어
통속 라틴어
갈리시아-포르투갈어
아스투리아스-레온어
고대 스페인어
공용어 (추가)약간의 브리튼어, 고트어, 반달어, 수에비어 화자
종교로마 가톨릭교회 (공식 종교)
정치
정치 체제군주제
군주오르도뇨 2세 (초대)
페르난도 7세 (마지막)
초대 군주 재임 기간910년–924년
마지막 군주 재임 기간1813년–1833년
입법부훈타
역사
성립910년
해체1833년
이전 국가아스투리아스 왕국
계승 국가레온 왕국, 스페인 왕국, 포르투갈 백국, 코투 미스투

2. 수에비 왕국 (409-585)

테오데마르 (또는 아리아미르), 갈리시아의 왕, 주교 루크레시오, 안드레, 마르틴과 함께. 비길라누스 코덱스 (또는 알벨덴시스), 에스코리알 도서관


409년, 갈리시아는 게르만족인 하스딩기 반달족과 수에비족 사이에 분할되었다. 대부분의 게르만족 침략과 마찬가지로, 원래 수에비족의 수는 비교적 적었고, 일반적으로 10만 명 미만,[10] 대개 3만 명 정도였다.[11] 그들은 주로 현대 포르투갈 북부와 서부 갈리시아 주변 지역, 브라가 (''Bracara Augusta'')와 포르투, 그리고 나중에는 루고 (''Lucus Augusta'')와 아스토르가(''Asturica Augusta'') 마을에 정착했다. 리미아(또는 리마) 강 계곡은 가장 많은 게르만족 정착민이 유입된 곳으로 여겨지며, 브라카라 아우구스타(현대 도시 브라가)는 이전에 갈리시아의 수도였던 것처럼 수에비족의 수도가 되었다.

419년, 반달족 왕 군데리크와 수에비족의 헤르메리크 사이에 전쟁이 발발했다. 네르바시안 산맥에서 봉쇄 후,[12] 수에비족은 로마의 도움을 받아 반달족을 바이티카로 도망가게 했다.[13] 경쟁자가 없는 상황에서 수에비족은 먼저 갈리시아 내에서, 그리고 나중에는 다른 로마 속주로 세력을 확장하는 시기를 시작했다. 병으로 인해 헤르메리크는 아들 레킬라에게 퇴위했고, 레킬라는 군대를 남쪽과 동쪽으로 이동시켜 메리다와 세비야를 정복했는데, 이곳은 루시타니아와 베티카의 로마 속주의 수도였다.[14]

레키아르는 서고트족 공주와 결혼했으며, 고대 로마 영토에서 동전을 주조한 최초의 게르만 왕이기도 했다. 레키아르는 동쪽으로 더 확장을 이끌어, 로마가 여전히 지배하고 있던 타라코넨시스 속주를 약탈했다. 로마 황제 아비투스는 서고트족 테오도리크 2세의 지휘하에 포에데라테스로 구성된 대규모 군대를 보냈고, 이들은 현대 아스토르가 근처의 오르비고강에서 수에비족 군대를 격파했다. 레키아르는 도망갔지만, 추격당해 붙잡혀 457년에 처형되었다.

레키아르의 죽음 이후 왕좌를 놓고 여러 후보가 등장했고, 결국 두 개의 연합으로 나뉘었다. 두 그룹 사이의 분열은 아마도 이베리아 반도에 수에비족을 구성했던 콰디와 마르코마니 부족의 지역적 결과로, 미니우스강 (현재 미뇨강)을 경계로 했다.[15] 북부의 수에비족은 루고를 정복하여 이 도시를 공동 수도로 사용했고, 남부의 수에비족은 리스본코임브라로 세력을 확장했는데, 이곳은 공격을 받았고, 로마인 주민들이 추방된 후 버려졌다. 465년까지 레미스문드는 고트족과 우호 관계를 맺고 자신의 백성의 아리우스파 개종을 장려한 결과, 수에비족의 유일한 왕으로 인정받았다.[16]

갈리시아의 왕 미로와 브라가의 마르틴, 오스트리아 국립 도서관에 소장된 1145년 마르틴의 ''정직한 삶의 공식'' 필사본에서 발췌. 이 책은 원래 미로 왕에게 헌정되었으며, 머리글에는 "가장 영광스럽고 평온하며 경건하고 가톨릭 신앙으로 유명한 미로 왕에게"라고 적혀있다.


575년에 설립되어 20세기 초까지 사용된 갈리시아의 산 페드로 데 로카스 수도원


루고의 로마 성벽


이 지역의 역사, 사실 서유럽 전체에 대한 정보가 거의 남아 있지 않은 불분명한 시기를 거친 후,[18][19] 수에비 왕국은 6세기 후반에 유럽 정치 및 역사에 다시 등장한다. 이는 성 브라가의 마르틴의 도착 이후의 일로, 그는 수에비족을 니케아 기독교로 개종시키고 결과적으로 니케아 기독교를 믿는 다른 지역 강국, 즉 프랑크족과 동로마 제국과의 충성을 목표로 하는 판노니아 출신 수도사였다.[20]

아리아미르 왕 치하에서 제1차 브라가 공의회를 소집하여 수에비족의 니케아 기독교로의 개종이 분명해졌다. 이 공의회는 프리스킬리아누스를 정죄했지만 아리우스주의에 대해서는 비슷한 언급을 하지 않았다. 이후 테오데마르 왕은 그의 왕국에 대한 행정 및 교회 구역을 정비하여 새로운 교구를 만들고, 많은 수에비 공동체가 있는 루고를 브라가와 함께 수도 대주교 수준으로 승격시켰다.

테오데마르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미로 왕은 제2차 브라가 공의회를 소집했는데, 이는 비스케이 만의 브리토니아에 있는 브리튼족 교구에서 동쪽의 아스토르가, 남쪽의 코임브라와 이다냐에 이르기까지 왕국의 모든 주교가 참석했다. 참석한 주교 중 5명이 게르만 이름을 사용했는데, 이는 이 나라의 다양한 공동체의 통합을 보여준다. 미로 왕은 또한 아리우스주의 비시고트족과의 갈등을 촉진했는데, 그들은 레오비길드 왕의 지도 아래 6세기 초 프랑크족의 아키텐 정복과 추방 이후 주로 동고트족이 통치했던 분열된 왕국을 재건하고 있었다. 변경 지역에서 충돌한 후 미로와 레오비길드는 잠정적인 평화에 합의했다.

수에비족은 585년까지 독립을 유지했는데, 레오비길드가 계승 문제에 대한 갈등을 구실로 수에비 왕국을 침공하여 결국 정복했다. 아우데카, 수에비족의 마지막 왕으로, 그의 매형인 에보릭을 폐위시켰지만 585년에 붙잡히기 전까지 1년 동안 저항했다. 같은 해에 말라릭이라는 귀족이 고트족에 반란을 일으켰지만 패배했다.[21]

비시고트족 언어와 마찬가지로 수에비족 언어의 흔적도 거의 남아 있지 않으며, 그들은 곧 현지 속라틴어를 채택했다. 수에비족 기원으로 추정되는 단어로는 현대 갈리시아어 및 포르투갈어 단어인 ''라베르카''(종달새), ''메이셍그라'' 또는 ''메젠그라''(박새), ''로비오''(포도나무), ''에스카'' (측정 단위, 이전에는 "컵"), ''그로바''(계곡) 등이 있다.[22]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지역 지명 및 인명에 대한 그들의 기여였다.

프레데가르 연대기에 따르면, "갈리시아의 왕 미로가 죽은 후, 그의 아들 에보릭과 사위 아우데카가 왕국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싸우는 동안 레오비길드는 수에비족과 모든 갈리시아를 고트족의 권력 아래 두었다."[24]

레카레드 왕은 톨레도 제3차 공의회 조항에서 "우리가 받은 은혜에는 고트족의 개종뿐만 아니라, 신의 도움으로 우리의 왕국에 복종시킨 수에비족의 무한한 무리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잘못으로 이단에 빠졌지만, 우리의 부지런함으로 그들을 진리의 근원으로 이끌었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거룩하신 아버지들이여, 우리에게 얻어진 이 가장 고귀한 국가들을 거룩하고 속죄적인 희생으로 여러분의 손으로 영원하신 하느님께 바칩니다."라고 언급했다.

2. 1. 수에비 왕국의 주요 특징

수에비족이 5세기에 로마 제국의 갈라이키아 지방에 정착하면서 수에비 왕국이 시작되었다. 헤르메릭 왕은 로마 황제 호노리우스와 협정을 맺어 갈리시아에 토지를 할양받았다.[5] 수에비족은 브라카라 아우구스타를 수도로 삼아 왕국의 기초를 세웠는데, 처음에는 '수에비 왕국'으로 불렸지만 나중에는 '갈리시아 왕국'으로 불렸다.

1세기 후, 갈라이키족과 수에비족 사이의 차이가 사라지면서 '갈리시아 왕국', '갈리시아 왕', '수에비 왕', '모든 갈리시아 지방의 왕'과 같은 용어들이 사용되었고,[8] 브라가의 마르틴 같은 주교들은 '갈리시아의 주교'로 인정받았다.[9]

갈리시아의 독립적인 수에비 왕국은 409년부터 585년까지 존속했으며, 이 기간 대부분 동안 비교적 안정적으로 유지되었다. 438년 헤르메릭 왕은 토착민인 ''갈라이키''와 평화 조약을 맺었다.

레키아르 왕은 449년에 니케아 신조를 따르는 기독교로 개종했는데, 이는 로마 이후 유럽의 게르만 왕 중 최초였다. 그는 고대 로마 영토에서 동전을 주조한 최초의 게르만 왕이기도 했다.

역사가 호세 안토니오 로페스 실바는 갈리시아 문화의 본질적인 성격이 수에비 문화와 이베로-로마 문화가 혼합되어 형성되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3. 서고트 왕국의 종속 왕국 (585-711)

585년, 히스파니아와 셉티마니아의 서고트족 왕 리우비길드는 아우데카 왕을 격파하고, 이후 왕위 찬탈자 말라릭을 격파하여 갈리시아 왕국을 병합했다. 이로써 수에비족 왕국은 톨레도의 서고트 왕국의 여섯 번째 속주가 되었다.

서고트족의 지배는 갈리시아 사회를 완전히 파괴하지 않았다. 브라카라, 두미오, 포르투스 칼레 또는 마그네토, 투데, 이리아, 브리토니아, 루쿠스, 아우리아, 아스투리카, 코임브리아, 라메코, 비세우, 그리고 에기타니아의 수에비족 가톨릭 교구들은 정상적으로 운영되었다.[25] 리우비길드 통치 기간에는 루고, 포르투, 투이, 비세우 등에서 새로운 아리우스파 주교들이 수에비족 사이에서 나타나[25] 가톨릭 주교들과 함께 활동했다. 이 아리우스파 주교들은 589년 레카레드 왕이 톨레도 제3차 공의회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하면서 가톨릭으로 돌아왔다.[26]

수에비족에게서 물려받은 영토 및 행정 조직은 새로운 속주 지위에 통합되었고,[27] 루고는 다시 주교구로 축소되어 브라가에 종속되었다.[28] 한편, 수에비족, 로마족, 갈리시아 문화, 종교, 그리고 귀족 엘리트들은 새로운 군주들을 받아들였다. 농민들은 주로 켈트족, 로마족, 수에비족 출신의 농노와 노예로 구성된 공동체를 유지했는데, 6세기와 7세기 동안 주요 서고트족 이주는 발생하지 않았다.[29]

이러한 연속성은 갈리시아가 왕국 내에서 차별화된 속주로 지속되게 했다. 이는 여러 톨레도 공의회의 조항, 비클라의 요한과 같은 연대기, 왐바가 찬양한[30] 군사법 등에서 나타났다. 레케스빈트 치세의 행정 개혁으로 수에비족이 갈리시아에 병합했던 루시타니아 교구들(코임브라, 이다냐, 라메고, 비세우, 살라망카 일부)이 루시타니아로 복원되었다.[27] 이 개혁으로 갈리시아의 조폐창은 수십 개에서 세 개(루고, 브라가, 투이)로 감소했다.

7세기 갈리시아의 가장 주목할 만한 인물은 브라가의 프룩투오수스였다. 그는 지방 서고트족 ''두스''(군사 지방 총독)[31]의 아들이었고, 접근하기 어려운 곳에 많은 수도원을 설립한 것으로 유명했다. 그는 또한 두 개의 수도원 규칙서를 썼는데, 수도 공동체가 주교의 원격 권한 아래(''episcopus sub regula'') 수도원장에 의해 통치되고, 공동체의 각 구성원이 수도원장과 서면 계약을 체결하는 특징을 가졌다.[32][33] 프룩투오수스는 나중에 두미오의 수도원장 주교로 축성되었고, 656년에는 브라가 주교이자 갈리시아의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후년에 서고트족 군주국은 무역 감소로 쇠퇴했다. 갈라이키아 역시 영향을 받았고, 브라가의 프룩투오수스는 일반적인 문화적 쇠퇴와 이전 시대의 추진력 상실을 비난했다.

서고트 시대 말기의 위기는 에기카의 치세로 거슬러 올라간다. 에기카는 아들 비티자를 후계자로 임명하고, 살아있는 동안 왕위에 연관시켰다. 701년, 흑사병이 톨레도에 도달하자, 에기카와 비티자는 수도를 떠났다. 비티자는 투이에서 수에비족 왕국을 통치하도록 보내졌을 가능성이 제기되었으며,[34][35] 그곳이 그의 수도로 기록되어 있다. 13세기 연대기 작가인 투이의 루카스는 비티자가 유대인에 대한 억압을 완화했다고 기록했는데, 이는 투이에서의 통치를 언급하는 것일 수도 있다.[36]

702년, 에기카가 죽자 비티자는 톨레도로 수도를 옮겼다. 710년, 서고트족 귀족의 일부가 로데릭을 왕위에 올리면서 내전이 발발했다. 711년, 로데릭의 적들은 이슬람 군대를 불러들여 과달레테 전투에서 그와 맞섰다. 이 패배는 로데릭과 서고트족 통치의 종말을 의미했다.

4. 아스투리아스 왕국과 레온 왕국 시대 (711-1230)

서고트 왕국이 711년에 멸망한 후, 서고트족 잔존 세력은 아스투리아스 산악 지대로 피신하여 펠라요를 지도자로 추대하고 새로운 왕국을 건설했다. 알폰소 1세는 갈리시아 지역으로 아스투리아스 왕국의 영토를 확장했다. 이 왕국은 '두에루 사막'이라 불리는 무인지대까지 영토를 넓혔고, 이후 재정착이 이루어졌다. 910년 알폰소 3세 사후, 왕국은 아스투리아스, 갈리시아, 레온으로 분할되었다.

966년, 바이킹이 갈리시아를 약탈하기도 했다.[21]

갈리시아 왕국의 역대 국왕은 다음과 같다.


  • 오르도뇨 2세 (910년 - 924년, 914년부터 레온 국왕 겸임)
  • 프루엘라 2세 (924년 - 925년, 910년부터 아스투리아스 국왕, 924년부터 레온 국왕 겸임)
  • 알폰소 프로일라스 (925년 - 926년)
  • 산초 1세 오르도녜스 (926년 - 929년)
  • 알폰소 4세 (929년 - 931년, 925년부터 레온 국왕 겸임)


이후 갈리시아 왕국은 레온 왕국에 통합되었다. 베르무도 2세 (982년 - 999년)는 982년 라미로 3세에게 반란을 일으켜 갈리시아 국왕이 되었고, 984년부터 레온 국왕도 겸했다.

1063년, 페르난도 1세는 카스티야 왕국을 아들들에게 분할했고, 갈리시아는 가르시아에게 돌아갔다. 1065년, 포르투칼레 백작 누노 2세 멘데스는 독립을 선언하고 갈리시아-포르투갈 왕국을 형성하려 했으나, 1071년 페드로소 전투에서 가르시아 2세에게 패배하여 전사했다.

1072년, 가르시아 2세는 산초 2세에게 공격받아 유폐되었고, 알폰소 6세가 갈리시아-포르투갈 왕을 선언하며 페르난도 1세의 영토를 재통합했다. 이후 갈리시아는 카스티야-레온 왕국의 일부로 존속했지만, 포르투갈 지역은 엔리케 데 부르고냐 아래에서 독자적인 세력으로 성장했다.

갈리시아-포르투갈 왕국 분리 이후의 갈리시아 국왕은 다음과 같다.

  • 우라카 (1109년 - 1111년, 1126년까지 카스티야 여왕 및 레온 여왕)
  • 알폰소 7세 (1111년 - 1157년, 1126년부터 카스티야 및 레온 왕)
  • 페르난도 2세 (1157년 - 1188년, 레온 왕 겸임)
  • 알폰소 9세 (1188년 - 1230년, 레온 왕 겸임)

4. 1. 포르투갈의 분리 (1128)

11세기 말, 부르고뉴 가문의 엔리케가 포르투갈 백작으로 임명되면서 포르투갈 지역의 독자성이 강화되었다. 1128년, 상 마메데 전투에서 포르투갈 백작 아폰수 엔리케스(훗날 아폰수 1세)는 그의 어머니 테레사와 페르난도 페레스 데 트라바의 갈리시아 및 포르투갈 연합군을 격파하였다.[85] 이 승리로 아폰수 엔리케스는 포르투갈의 실질적인 지배자가 되었고, 어머니 테레사는 권력을 잃었다.

이후 테레사의 죽음과 아폰수가 우리케 전투에서 무어인을 상대로 승리하면서, 그는 1139년에 포르투갈의 왕으로 선포되었고, 1143년 사모라 조약을 통해 포르투갈의 독립이 인정되었다.[85] 이로써 갈리시아 왕국은 현재의 갈리시아 지방과 북부 포르투갈로 축소되었다.

4. 2. 콤포스텔라 시대 (1111-1230)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는 성 야고보(산티아고)의 유해가 발견된 성지로, 갈리시아는 종교적, 문화적 중심지로 발전하였다. 디에고 젤미레스 주교는 콤포스텔라를 대주교구로 승격시키고, 갈리시아의 정치적, 경제적 발전에 기여하였다.[90] 1111년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 갈리시아 고위 귀족들은 알폰소 7세를 갈리시아 왕으로 즉위시켰다.[86] 젤미레스 주교는 스페인의 수석 주교가 되려 했지만, 톨레도에 그 지위를 잃었다. 그러나 그는 콤포스텔라를 갈리시아 왕국의 수도 교회로 인정받으려 했다.[91]

1128년 갈리시아 귀족 지도자 페르난도 페레스 데 트라바는 포르투갈 백작 테레사와 함께 갈리시아와 포르투갈 대부분에서 활동했고,[92] 테레사의 아들 아폰소 엔리케스에게 패했다. 이는 미래 포르투갈 왕국의 기초가 되었다.

알폰소 7세는 영토를 나누어 레온과 갈리시아를 페르난도 2세에게 물려주었다.[93] 페르난도 2세는 파드론, 리바다비아, 노이아, 폰테베드라, 리바데오 등에 헌장(''카르타스 포보아'' 또는 ''포로스'')을 부여하여,[99] 도시 발전을 장려하고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의 발전에 기여했다.[100]

1188년 페르난도 2세가 사망하고, 아들 알폰소 9세는 갈리시아 귀족과 콤포스텔라 대주교의 지원을 받아,[101]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 왕으로 선포되었다.[102] 그는 "레온의 왕"과 "레온 및 갈리시아의 왕" 칭호를 사용했다.[103] 알폰소 9세는 카스티야 및 포르투갈과 경쟁하고,[104] 도시 개발 정책을 유지하며 왕실 권력을 증진했다.[105] 그는 베탄소스, 아 코루냐, 바이오나 등에 헌장을 부여했다.[108]

새로 건설된 ''레겐고'' 마을은 농민들을 끌어들였다. 농민들은 왕의 직접 보호 아래 더 나은 생활 조건을 찾았다. 이 부르크들은 경제 다변화를 이끌었고, 어업 발전을 촉진했으며, 소금에 절인 생선, 생선 기름, 와인 등의 산업 생산을 촉진하여 잉글랜드와 지중해로 판매했다.[110]

"수도이자 거울"인 콤포스텔라는 번영의 쇼케이스가 되었고,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의 마스터 매튜 작품과 수많은 로마네스크 양식 건물에서 나타났다. ''코덱스 칼릭스티누스''[116] 및 ''콤포스텔라 연대기''[117] 같은 라틴어 문학 작품도 창작되었다.

5. 카스티야 왕국과의 통합 (1230)

레온의 알폰소 9세는 두 번 결혼했다. 첫 번째는 포르투갈의 테레사와 했고, 그 사이에서 아들 페르난도와 두 딸 산차와 알돈사를 두었다. 두 번째는 카스티야의 베렝게라와 했고, 페르난도를 포함한 다섯 자녀를 두었다. 1214년, 알폰소 9세의 첫 번째 결혼에서 얻은 아들 페르난도가 사망하면서, 두 번째 결혼에서 얻은 어린 페르난도가 아버지의 상속자가 되었다. 1217년 카스티야 왕 엔리케 1세가 사망하고 베렝게라가 자신의 권리를 아들에게 양도하면서, 페르난도는 아버지의 의지와는 반대로 카스티야의 왕이 되었다.[118]

알폰소 9세는 자신의 왕국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갈리시아-레온 상속 관습을 적용하여 알돈사를 미래의 갈리시아 여왕으로, 산차를 레온 여왕으로 지명하고, 삼촌 포르투갈의 아폰수 2세의 지원을 받아 그들의 왕위 계승을 도왔다.[119] 알폰소 9세는 에스트레마두라 정복에 대한 도움에 감사하기 위해 사도에게 순례하러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가던 중 1230년 사리아에서 사망했고, 그의 시신은 그곳에 안치되었다.[120]

대부분의 레온 귀족들은 페르난도에게 기울었고, 페르난도는 새로운 포르투갈 왕 산초 2세의 지지도 얻었다. 레온과 갈리시아에서 충돌이 있은 후, 알폰소 9세의 두 전 부인인 베렝게라와 테레사는 테레사가 알돈사와 산차에게 연금을 대가로 왕위 주장을 포기하도록 하는 합의에 도달했다.[121] 그 결과, 페르난도 3세는 알폰소 9세의 레온과 갈리시아 왕국의 후계자가 되어, 카스티야 왕관으로 불리게 될 영구적인 연합을 이루었다.

6. 중세 후기 (1230-1486)

페르난도 3세의 통치는 갈리시아의 정치적 영향력이 감소하는 시기였다. 귀족과 갈리시아 도시 의회는 지역 주교들에게 권력을 잃었다.[132] 갈리시아는 확장된 왕국의 변방에 위치했으며, 왕국은 톨레도나 세비야에서 통치되었고, 점점 더 카스티야인의 통제를 받았다. 왕실은 콤포스텔라를 버리고 중앙 집권 정책을 시작했다. 그럼에도 갈리시아 귀족과 주교들은 가톨릭 군주 시대까지 카스티야 왕관으로부터 어느 정도 자율성을 유지했다.

1231년 페르난도는 갈리시아에 meyrino maorgl라는 직책을 설립했다.[133] 이 직책은 왕의 고위 관리이자 개인 대표였으며, 1251년에는 ''adelantado mayor''(갈리시아어: ''endeantado maior'')로 대체되었다. 13세기와 14세기 동안 이 직책은 지역 귀족이나 왕족이 맡았으며, 왕관과 왕국 간의 유동적인 관계를 유지하여 세비야 및 기타 안달루시아 도시 정복에 기여했다.[135]

페르난도의 중앙 집권 정책은 알폰소 10세 통치 기간에도 계속되었다. 콤포스텔라에서 시의회가 대주교와 갈등을 겪는 시기에, 그는 지방 정부에 왕실 대표인 ''알칼데''를 도입했으며,[136] 곤살보 고메스 대주교가 프랑스로 도망가도록 강요한 후 콤포스텔라 교구를 카스티야인에게 넘겨주었다.[137] 이는 15세기 이후 갈리시아 주교, 수도원장, 귀족이 카스티야인으로 교체되는 과정을 시작이었다.

카스티야(카스티야-톨레도)와 레온(갈리시아와 레온) 왕관은 국왕이라는 인물로 연결되었지만, 두 왕관은 정치적 특성을 유지했다.[139] 갈리시아와 레온은 법전 ''Liber Iudicium''과 자체 의회(''Cortes'')를 유지했다. 또한 갈리시아 왕국 내의 공문은 갈리시아어로 작성되었지만, 왕실 법원의 문서는 카스티야어로만 발행되었다.

알폰소 10세의 치세는 상속 문제로 인한 내전과 정치적 불안정으로 끝났다. 페르난도 데 라 세르다가 사망하자, 산초는 상속을 위해 반란을 일으켰고, 성공했다. 1295년 산초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 카스티야의 페르난도 4세의 치세는 반란을 일으킨 그의 삼촌 후안에 의해 쟁탈되었다.[141]

포르투갈의 디니스 1세의 도움을 받아 후안은 카스티야 왕위를 주장했지만, 페르난도의 측과의 협상과 갈리시아의 ''아델란타도 마요르''였던 파이오 고메스 차리뇨의 암살로 인해 주장을 철회하게 되었다.[142] 1296년 후안은 레온 귀족들을 이끌고, 아라곤과 포르투갈 왕들의 지원을 받아 레온과 갈리시아의 왕으로 선포되었다. 차리뇨의 뒤를 이은 페르난도 루이스 데 카스트로는 포르투갈과의 관계 개선을 촉구했다.[143]

이러한 분리 시도는 카스티야 귀족과 갈리시아 고위 성직자들의 반대에 직면하여 5년 동안 지속되었다. 포르투갈의 디니스 왕은 후안에게 갈리시아 왕국을 부여할 것을 제안했지만,[144] 1301년, 포르투갈 왕의 지원을 잃은 후안은 여러 작위를 받는 대가로 왕위 주장을 포기해야 했다.

1467년 ''Irmandiño''에 의해 파괴된 ''A Rocha Forte'' 성의 폐허. 1320년 베렝게르 드 랑도르의 부하들은 콤포스텔라 의회 의원들을 암살했다.


노이아의 성 마리아 '아 노바' 교회에 있는 알바로 파스 카르네이로의 묘, '1348년 8월 15일 사망'


14세기 초는 루고, 투이, 오렌세, 콤포스텔라 등 왕국의 도시들에서 발생한 내전으로 특징지어졌다.[146] 도시 의회가 ''레게가스''—''즉'', 국왕의 직속 통치를 받으며, 선출된 의회의 지휘 아래 사실상 자치 공화국이 되려는 열망은 주교들과의 갈등을 야기했다. 콤포스텔라는 12세기 초부터 부르주아와 주교 사이의 유혈 충돌을 겪었다.[147]

콤포스텔라 시의 갈등은 1320년 9월, 베렝게르 드 랑도르 신임 대주교가 산티아고 인근 그의 성인 ''A Rocha Forte''에서 귀족 알론소 수아레스 데 데자 및 시 의회 의원들을 암살하면서 최고조에 달했다.[151] 25년 후, 콤포스텔라 시 의회는 알폰소 11세 국왕으로부터 ''레게고'' 지위를 얻었다.[152]

1348년, 흑사병은 갈리시아의 항구에 도달하여 인구를 대폭 감소시키고,[153] 심각하고 지속적인 경제 위기를 초래했다.[154]

나헤라 전투. 갈리시아 군대는 페드로 1세 및 우드스톡의 에드워드(Edward of Woodstock)와 함께 싸웠으며, 엔리케 2세(Henry II of Castile)가 이끄는 카스티야 군대를 격파했다.


1360년, 갈리시아 왕국은 카스티야 왕위 계승 전쟁의 중심에 놓였는데, 이는 백년 전쟁과 관련 있었다.[155] 카스티야 왕위는 페드로 1세와 트라스타마라의 엔리케 2세 사이에서 다투어졌으며, 페드로 1세는 시의회를 기반으로 왕권을 확장하려 했고, 귀족들은 이에 반발했다.

알폰소 11세의 사생아이자 페드로의 이복 형제인 엔리케는 귀족들 사이의 불만을 이용하여 페드로에 대한 전쟁을 시작했다. 페드로 1세는 페르난도 로드리게스 데 카스트로가 이끄는 갈리시아의 카스트로 가문으로부터 지원을 받았다. 1366년, 페드로는 안달루시아로 도망쳤고, 페르난도 데 카스트로는 갈리시아로 돌아갔다. 같은 해, 페드로가 해외에 있는 동안, 엔리케는 갈리시아에서 일부 귀족들의 지지를 얻었다.[159]

1367년, 우드스톡의 에드워드의 지원을 받은 페드로는 나헤라 전투에서 승리했다. 1369년, 몽티엘 전투에서 페드로가 포로로 잡혀 살해당하면서 엔리케 2세가 카스티야 왕위를 장악하게 되었다.

포르투갈의 페르난두 1세


페드로 1세의 죽음과 헨리 2세의 즉위는 갈리시아 귀족 다수에게 반감을 샀다.[162] 페르난두 데 카스트루의 지도 아래, 갈리시아 왕당파와 도시들은[163] 포르투갈의 페르난두 1세를 왕으로 초청했다.[164]

페르난두는 개선 입성 시 많은 갈리시아 지지자들과 동행했다. 그는 투이, 레돈델라, 리바다비아, 오렌세, 루고, 파드론, 콤포스텔라, 아 코루냐[166]에서 환영을 받았다. 갈리시아에서의 짧은 통치 기간 동안 페르난두 1세는 갈리시아 요새를 재건하고, 갈리시아와 포르투갈 간의 무역을 자유화했다.[167] 그는 또한 투이와 아 코루냐에서 금화와 은화를 발행했다.[168]

카스티야의 헨리 2세는 뒤 게클랭 용병들의 지원을 받아 공세를 시작했고, 페르난두 1세는 포르투갈로 후퇴했다. 1371년, 페르난두 데 카스트루는 루고 근처 전투에서 패배했다.[169] 페르난두 데 카스트루는 포르투갈로 도망쳤지만, 이후 ''산타렝 조약''에 따라 가스코뉴로 추방되었다. 1372년, 헨리가 멘 로드리게스 데 사나브리아를 격파한 후, 대부분의 갈리시아 지역에 카스티야 통치가 재확립되었지만, 코루냐는 1373년까지 저항했다.[170]

존 오브 곤트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입성하는 모습, 장 프로아사르의 연대기 원고에서 발췌


존 오브 곤트


코루냐는 1373년까지 포르투갈에 충성을 유지했고, 주앙 페르난데스 드 안데이로는 잉글랜드와 포르투갈 간의 동맹을 협상하며, 갈리시아 정당에 대한 지원을 협상했다.[171] 1372년, 페드루 1세의 딸 콘스탄스가 카스티야 왕위를 주장하는 조약이 체결되었다. 그녀의 남편 존 오브 곤트는 그녀를 대신하여 카스티야 왕위를 주장했다.[172]

1386년, 우르바노 4세의 지원을 받아 카스티야 왕위에 대한 권리를 확인받아, 그는 코루냐에 상륙했다.[173] 존의 군대는 갈리시아 망명자들의 지원을 받아 폰테베드라, 비고, 바이오나, 베탄소스를 전투 없이 장악했고, 오렌세로 진격했다. 페롤 항구는 포르투갈의 주앙 1세에 의해 점령되었고, 리바다비아는 토머스 퍼시가 지휘하는 군대의 포위 공격을 받았다.[175]

존은 1386년과 1387년 갈리시아에서 페스트가 잉글랜드 군대를 약화시키면서 초기 성공을 활용할 수 없었다. 1387년에는 포르투갈과 함께 카스티야 공격을 시작했지만 실패했다. 1388년 평화 조약에서 랭커스터 공작과 카스티야의 콘스탄스는 금전적 보상과 그들의 딸과 카스티야의 엔리케 3세 사이의 결혼 동맹을 대가로 카스티야에 대한 주장을 포기했다.[177]

안드라데 가문의 성, 폰테데우메 아 노게이로사
충성파가 패배하고 그 지도자들이 망명하거나 사망한 후, 엔리케 2세와 후안 1세는 갈리시아에 외국 귀족 가문들을 봉토 소유자로 임명했다. 트라스타마라 백국은 엔리케 2세의 조카에게 주어졌고,[178] 1440년에 트라스타마라와 레모스 두 개의 백국으로 나뉘어 비에르소 변경 지역의 오소리오 가문에 주어졌다.[179] 남부 지역에서는 사르멘토 가문, 베나벤테의 피멘텔 가문에게도 특권이 주어졌다.[180] 15세기에는 산티아고 대주교나 트라스타마라 백작들이 과거에 행사했던 강력한 리더십 부재로, 갈리시아 왕국은 반독립적이고 경쟁적인 봉건 영지들의 집합체로 전락했다.[181]

15세기는 지역 귀족 가문들의 약탈 행위로 특징지어졌다.[182] 각 가문은 가문의 후계자에 의해 지휘되었다. 이들은 도시, 수도원, 주교구, 왕실 재산 등에 대한 경제적 및 사법적 권한을 획득하려 했다. 갈리시아 전역에서 성과 토루가 귀족들의 군대를 유지하고 약탈 전초기지로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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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회와 교회 사이의 갈등도 빈번하게 발생했으며, 1403년에는 루고 주교가, 1419년에는 오렌세 주교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184] 국왕의 원격성이 부분적으로 비난받았다. 15세기 동안 어떤 군주도 갈리시아를 방문하지 않았고, 가톨릭 군주가 1486년에 방문한 것이 유일했다.[186]

군주의 원격성은 갈리시아가 14세기 말 또는 15세기 초에 ''Cortes''(의회)에서 투표권을 잃는 결과를 초래했다. 1423년, 갈리시아 도시들이 부재한 가운데, 사모라 시는 갈리시아 왕국의 수도로 대우받기를 요청했고, 그 요청이 받아들여졌다.[188]

이러한 상황에서 갈리시아의 도시들은 1430년에서 1460년 사이에 조세 저항 운동을 벌였다.[189] 그들은 후안 2세와 엔리케 4세에게 특정 세금 납부를 거부하며, 왕국이 국왕에게 제공하는 많은 과중한 봉사, 효과적인 법 집행의 부재, 의회에 갈리시아 대표가 없는 것을 이유로 들었다.[191]

6. 1. 이르만디뇨 전쟁 (1467-1469)

팔라스 데 레이에 있는 팜브레 성, ''이르만디뇨'' 군대에 저항함


소토마요르


15세기, 유럽은 사회적, 경제적 위기를 겪었고, 갈리시아 왕국에서는 주교와 귀족들이 교회, 장인, 농민들을 잔혹하게 억압하면서 여러 차례 봉기가 일어났다.[192] 반란군은 대체로 '이르만다데스'('형제단')라는 조직을 만들어 활동했는데, 이들은 특별한 상황에서 국왕의 허락을 받아 평화와 정의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무장한 사람들이었다.

1467년 봄, 멜리데에서 갈리시아 왕국 일반 의회(''훈타 헤네랄 도 레이노 데 갈리시아'')가 열렸다.[195] 격렬한 토론 끝에 귀족들은 모든 요새와 성을 ''이르만다데'' 관리에게 넘겨주기로 결정했다. 이로 인해 많은 하급 귀족들이 도망쳤지만, 일부 귀족들은 ''이르만디뇨''('작은 형제들') 군대에 저항했고, 결국 카스티야와 포르투갈로 조금씩 밀려났다.[195] 당시 사람들은 이 상황을 '참새들이 매를 쫓아냈다'라고 묘사했다.[196] 그해 남은 기간 동안 형제단 군대는 갈리시아 전역을 돌아다니며 영주들과 싸우고 수십 개의 요새를 무너뜨렸다.

1467년부터 1469년까지 갈리시아 왕국은 도시 주민들이 이끄는 ''이르만다데''가 통치했다. ''이르만다데'' 군대는 대부분 무장한 농민들로 구성되었고, 군사 경험이 풍부한 귀족들이 이들을 지휘했다. 왕국 일반 의회는 1467년 베탄조스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1468년 루고, 1469년 오렌세에서 다시 열렸다. 그러나 1469년 가을, 망명했던 귀족들이 힘을 모아 갈리시아로 쳐들어왔다. 페드로 알바레스 데 소토마요르는 포르투갈에서 총을 든 병사들과 용병들을 이끌고 왔고, 콤포스텔라의 폰세카 대주교는 사모라에서, 레모스 백작은 폰페라다에서 진격해 왔다. 한편, 갈리시아 내에서 저항하던 다른 귀족들도 공격을 시도했다. 1469년과 1470년, ''이르만디뇨'' 군대는 잘 방어된 도시인 아 코루냐 등을 제외하고 전국에서 패배했다.[197]

6. 2. 가톨릭 군주 시대 (1474-1516)

1474년 이사벨 1세가 즉위하자, 그녀의 이복 여동생 후아나와 이사벨 사이에 내전이 발발했다. 이사벨은 사촌 페르난도 2세와 결혼하여 아라곤과 카탈루냐의 지지를 받았고, 후아나는 포르투갈 왕 아폰수 5세와 결혼하여 포르투갈의 지지를 받았다. 갈리시아에서는 대주교 폰세카는 이사벨 편을, 페드로 알바레스 데 소토마요르는 포르투갈과 남부 갈리시아에서 큰 이익을 가졌기 때문에 후아나 편을 들었으며, 포르투갈 왕으로부터 카미냐 백작 칭호를 받았다. 하지만 대부분의 귀족들은 승자의 편에 서기 위해 신중하게 행동했다.[203]

1476년 10월, 폰세카는 200명의 창기병과 5000명의 보병으로 구성된 군대를 이끌고 페드로 ''마두르가''가 지키는 요새 폰테베드라를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한편, 라드론 데 게바라가 지휘하는 바스크 해군은 바이오나를 점령하고 비베이로를 공격했지만, 페드로의 끈기로 무승부를 기록했다.[204] 1479년, 폰세카의 군대는 다시 페드로 마두르가를 상대로 남쪽으로 이동했고, 일련의 전투 끝에 카미냐 백작을 포르투갈로 몰아냈지만, 투이, 살바테라 데 미뇨 및 기타 마을과 요새는 여전히 그의 백성과 포르투갈 동맹군이 지키고 있었다. 1480년 평화 조약에서 가톨릭 군주인 이사벨과 페르난도를 여왕과 왕으로 인정했고, 포르투갈 및 후아나와의 평화 조약 조건에 따라 페드로 ''마두르가''를 포함한 이사벨의 모든 적에게 사면이 주어졌다.

같은 해, 갈리시아 귀족들의 조언에도 불구하고,[205] 가톨릭 군주는 카스티야 경찰 및 군사 부대인 ''산타 에르만다드''를 갈리시아로 보냈다. 이 부대는 용병 부대로 보강되었으며, 국가를 평정하고 모험가와 도둑을 제거하려는 명목으로 군주의 정책을 위한 야전군으로도 사용되었다.[208] 이는 곧 외국인으로 구성된 기관이라는 비판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206] 연간 이상이 소요되는 지역 경제에 큰 부담이 된다는 비판도 받았다. - 비교하자면,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으로의 첫 번째 항해의 예산은 불과 였다 - 그러나 또한 지역 주민들에게 자의적이고 무례한 태도를 보였다는 비판도 받았다.[207]

가톨릭 군주는 개인 대표자로서 1475년에 처음 설립된 갈리시아 왕국의 새로운 전권 총독과 ''Justiçia Mayor''(검찰총장)를 비롯하여 일련의 다른 관리 및 징수 대리인을 파견했다. 그들은 또한 일부 도시와 마을에 왕립 감사관을 임명했다.[209]

1480년부터 1485년까지 ''산타 에르만다드''와 새로운 관리들은 지역 지지자들의 지원을 받아 주로 반란을 일으킨[210] 귀족들을 경제적, 군사적으로 괴롭혔다.[211] 그러나 반란은 레모스 백작의 사망으로 끝났고, 파르도 데 셀라 원수와 페드로 ''마두르가'' 백작을 상대로 한 전쟁은 거의 동시에 종결되었다. 셀라는 1483년 몬도녜도에서 참수되었고, 페드로는 1485년 자신의 아들 알바로에 의해 소토마요르 가문을 구하려는 필사적인 시도로 폐위되었다.[212]

1500년 ''갈리시아 왕국 왕립 법원'' (상설 왕립 법정)의 설립과 이후 갈리시아 수도원이 카스티야 수도원에 강제로 개혁되고 복종한 것은 갈리시아 왕국이 카스티야 왕관 아래 ''사실상'' 통합되었음을 의미했다.[213]

7. 근대 (1516-1833)

소포니스바 앙귀솔라가 그린 펠리페 2세의 초상화. 펠리페 2세의 치세는 경제 및 사회적으로 심각한 위기를 겪었고, 문화 발전에도 악영향을 끼쳤다.


합스부르크 왕가 시대에 갈리시아 왕국은 스페인 제국의 일부로서 대외 전쟁과 경제 침체의 영향을 받았다. 16세기에는 스페인 종교 재판이 강화되면서 갈리시아의 문화적 발전이 억압받았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는 왕위를 포기하고 자신의 영토를 형 페르디난트 1세와 아들 펠리페 2세에게 나누었다. 그 결과 합스부르크 가문의 유럽 제국과 보편적 가톨릭 군주국이라는 개념이 사라지게 되었다.[224] 펠리페 2세는 네덜란드, 프랑스, 영국, 포르투갈,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는데, 이는 갈리시아의 사회와 경제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1588년, 펠리페 2세(일명 "무적함대")와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 해군 간의 전투. 영국이 승리했다.


펠리페 2세는 루터교에 대한 개인적인 십자군을 일으켜, 갈리시아 왕국이 종교 개혁, 신세계 개척, 과학 혁명에 참여하는 것을 막았다. 1562년, 스페인 종교 재판을 통해 성무성을 갈리시아 왕국에 배치했다. 종교 재판은 문화적, 종교적 탄압의 도구였으며, 화형에 처해질 수 있는 등 심각한 결과를 초래했다.[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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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리페 2세의 치세는 유대인 추방, 언어 탄압, 종교 박해 등으로 특징지어진다. 1568년 그라나다 왕국의 알푸하라스에서 펠리페는 80,000명의 그라나다 무슬림들을 왕국 전역으로 강제 분산시키고 그 자리에 기독교인을 도입하라고 명령했다. 1572~77년 사이에 수천 가족의 갈리시아 가족들이 그라나다로 보내졌고,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사망했다.[224]

17세기에는 펠리페 3세, 펠리페 4세, 카를로스 2세의 치세를 거치면서 합스부르크 왕가와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포르투갈 사이의 전쟁이 계속되었고, 이는 갈리시아에 큰 사회적, 경제적 영향을 미쳤다. 특히, 포르투갈과의 전쟁(1640-1668)과 네덜란드와의 전쟁은 갈리시아 농민들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224]

1700년, 카를로스 2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면서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했다. 갈리시아 왕국은 카스티야 왕국이 지지하는 펠리페 5세에게 군사적 지원을 제공해야 했으며, 펠리페 5세가 전쟁에서 승리했다. 이 전쟁의 결과로 누에바 플란타 칙령(1707–1716)이 시행되어 아라곤 연합 왕국은 해체되고, 카스티야 정부가 단독으로 통치하는 "스페인 왕국"이 수립되었다. 또한 부르봉 왕가는 프랑스 모델에 따라 갈리시아 왕국을 포함한 영토에 총사령관의 지휘를 받는 "지방 인텐던시"를 설치했다.

부르봉 왕가는 스페인 영토 내에서 문화와 언어를 표준화하려는 정책을 펼쳤다. 비 카스티야 원어민 언어를 사용하는 부르봉 영토의 언어적 다양성을 종식시키기 위해 법률이 제정되었다.

7. 1. 계몽주의 시대 (18세기)

계몽주의 시대는 18세기 유럽에서 시작되었으며, 경험적 아이디어, 철학, 정치 경제, 그리고 물리학, 화학, 생물학 등의 과학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나타냈다. 이로써 갈리시아 왕국의 역사적 개성, 문화적, 경제적 다양성에 대한 관심이 새로워졌으며, 이는 갈리시아를 특별한 필요가 있는 독특한 정치체로 인식한 중요한 지역 작가들의 덕분이었다.[1]

마르틴 사르미엔토의 초상화


인적 자원과 천연 자원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왕국을 근대화하는 광범위한 작업에서 갈리시아 학회와 아카데미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예를 들어, ''갈리시아 왕국 농업 아카데미''(1765년 1월 20일 개관), ''갈리시아 왕국 경제 협회''(1784년 2월 15일),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1784년)와 ''루고''(1785년)의 ''국가 우호 협회'', 그리고 ''갈리시아 왕국 왕립 어부 대부업소''(1775년)와 같은 야심찬 제안들이 있었다.[1]

계몽주의 작가들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해로운 정책에서 비롯된 왕국의 동시대 문제를 처음으로 비판했다. 이 작가들은 도로 상태, 불필요한 수입, 대량 이민, 언어적 동화 정책, 왕국의 경제적 소외에 대해 보고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요구로 인해, 그들은 다른 문제들과 함께, 아 코루냐에 ''해상 및 육지 영사관''을 설립하여 갈리시아가 미국 식민지와 무역할 수 있게 되었다.[1]

두 명의 성직자, 베니토 헤로니모 페이호 이 몬테네그로와 마르틴 사르미엔토는 왕국의 언어와 문화에 대한 엄청난 공헌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몬테네그로는 갈리시아 농민의 비참함을 처음으로 비판하며 왕국 행정의 변화를 제안했다. 식물학과 자연 의학에 대한 광범위한 지식을 가진 사르미엔토는 어원학에 전념했으며, ''갈리시아 언어의 음성과 구절 목록''(1745–1755)을 저술하며 갈리시아어의 훌륭한 옹호자였다.[1]

1762년, 마르틴 사르미엔토는 "660 매의 작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며 카스티야어의 도입에 대해 비판했다.[1]

갈리시아에서 카스티야어(Castilian) 사용이나 오용이 도입된 이유가 무엇인지 여러 번 생각했는데,... 누가 그것을 도입했을까?... 갈리시아인이 아니라, 16세기 초 갈리시아 왕국에 쏟아져 들어와 토지를 경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가장 좋은 고기와 피를 먹고, 성직자나 문관 등 가장 좋은 직업을 얻기 위해 온 외국인(카스티야인)들이 갈리시아어를 모르고, 말이나 글로도 쓰지 않으면서, 순수한 갈리시아어를 쓰는 사람들에게 카스티야어로 글을 쓰는 괴물을 도입했다.



경제적 주제는 호세프 코르니데 사아베드라, 페드로 안토니오 산체스, 루카스 라브라다와 같은 다른 갈리시아 귀족들뿐만 아니라, 프란시스코 데 카스트로와 같은 성직자, 안토니오 라이문도 이바녜스와 같은 상인들에 의해 강조되었다. 그들은 모두 ''갈리시아 해안의 정어리 어업 보고서''(1774년), ''갈리시아 왕국의 경제적 설명''(1804년)과 같은 경제 개발에 매우 중요한 많은 작품의 저자였다.[1]

8. 근대 이후의 갈리시아

1400년 이후 카스티야어의 사용이 갈리시아에서 증가했고, 1500년 이후에는 갈리시아 엘리트가 카스티야 관리로 대체되면서 갈리시아어와 갈리시아인에 대한 차별이 점차 심화되었다.[129][130] 16세기에는 묘비 등에 공공 비문이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17세기와 18세기에 갈리시아의 역사, 언어, 문화 등을 옹호하는 문학 및 역사 작품이 등장했다.[130] 이후 갈리시아어는 19세기까지 문학적으로 거의 사용되지 않는 지역 언어가 되었고, 20세기에 들어서야 공식적인 인정을 받게 되었다.

스페인 독립 전쟁 시기, 푼타(:gl:Xunta)는 프랑스에 맞서 갈리시아가 독립국임을 선언했으나(1808년 - 1813년),[130] 1813년 국왕 페르난도 7세는 갈리시아를 다시 스페인에 통합시켰다.[130]

마리아 크리스티나 데 보르본-두 시실리아 섭정 시기인 1833년, 스페인의 지방 행정 구역 개편으로 갈리시아 왕국은 공식적으로 소멸하고 아 코루냐, 루고, 오렌세, 폰테베드라의 4개 주로 분할되었다. 1846년에는 자유주의 무장 봉기인 카랄의 순교자들(Mártires de Carral) 이후 ''갈리시아 정부 훈타''(Junta de Gobierno de Galicia)를 구성하여 24일 동안 영토적 통일성을 회복했지만, 왕국의 지위를 되찾지는 못했다.

8. 1. 현대 갈리시아의 과제

현대 갈리시아는 스페인 중앙 정부와의 관계에서 더 많은 자치권을 확보하고, 경제 발전을 이루는 것이 중요한 과제로 남아 있다. 갈리시아어와 문화를 보존하고 발전시키는 것은 갈리시아 정체성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이다. 중도진보적 관점에서는, 갈리시아의 역사적 경험을 바탕으로 자치와 연대를 강화하고, 사회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9. 상징

레온의 알폰소 9세 국왕을 묘사한 로마네스크 양식의 미니어처
에는 상단에 그의 역사적 칭호인 ''Rex Legionensium et Gallecie''(레온 및 갈리시아의 왕)가 나타나고, 하단에는 레온 군주제의 상징인 자주색 사자가 묘사되어 있다.[1]

9. 1. 자주색 사자



12세기 중반 이후 유럽의 전장에서 여러 상황이 겹치면서 전쟁의 문장 방패와 같은 상징을 그리는 관습이 생겨났다. 중세 시대 투구의 안면 보호대가 전투원들의 얼굴을 가리면서, 전장에서 아군과 적군을 구별할 필요성이 생겼기 때문이다. 또한 밝고 선명하며 대칭적인 형태로 장식된 방패는 기사도 사회에서 높은 장식적 가치를 지녔다.

최초의 문장 기호는 왕들이 자신을 식별하기 위한 개인적인 표식으로 사용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왕족과 가까운 상류층에서도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결국 그들이 관할권을 행사하는 영토, 즉 왕국을 대표하는 데 사용되었다.

유럽에서 문장 표지를 사용한 최초의 왕 중 한 명은 레온의 왕 알폰소 7세였다. 그는 12세기 초부터 고대 상징에 따라 자주색 사자를 소심하게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강한 사자"를 뜻하는 ''레오 포르티스''(Leo Fortis)로 군주의 권력과 으뜸을 상징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왕국인 레온의 이름과 관련된 말장난이기도 했다.[1] 이 문장은 그의 아들 페르난도 2세 시대에 발전했고, 마침내 알폰소 9세에 의해 확립되었다.[1]

9. 2. 성배

13세기 후반부터 왕국과 그 왕실 상징의 목록을 담은 문장집이 등장했다. 갈리시아 왕국의 경우, 수 세기 동안 왕국이 누려온 명성으로 인해 초기 유럽 문장집에 포함되었다. 그러나 12세기부터 레온 왕국의 왕이기도 했던 갈리시아 왕을 위한 고유한 상징이 없었기 때문에, 중세 문장학자들은 이름의 음성에서 파생된 상징인 지명 문장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1282년에 제작된 영국의 문장집 ''세가르 롤(Segar's Roll)''은 성배를 갈리시아 왕과 왕국(''Roy de Galice'')의 문장으로 지정한 최초의 문장집이었다. 이는 갈리시아를 뜻하는 앵글로-노르만 단어인 ''Galyce''에서 직접 유래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이 단어는 ''Calice''(성배)와 매우 유사했다.[226] 그 이후, 다양한 유럽 문장집에서 성배를 갈리시아 왕국의 상징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15세기 중반, 이 상징은 갈리시아에 전해졌으며, 성배가 이미 유럽 전역에 널리 퍼져 있었고 갈리시아의 역사와 깊은 믿음에 이미 존재했기에 쉽게 수용되었다.

이후, 과거 갈리시아-레온 왕국의 자주색 사자는 널리 알려진 지명 문장에 밀려 대표성을 잃고, 레온 왕국에 의해 배타적으로 채택되었다. 반면 갈리시아에서는 성배가 갈리시아의 현대 문장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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